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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M 리포트] 이머시브 씨어터의 진화를 꿈꾸며

테크 품은 예술 21회

2018-09-06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테크M=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미국 뉴욕 첼시에 자리한 5층짜리 건물. 호텔처럼 꾸며진 이곳에서는 저녁마다 여느 호텔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100여개 객실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 가면을 썼다는 걸 빼면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3시간가량 이방 저방을 기웃댈 뿐 아니라 심지어 각자 아무 말 없이 그 방의 주인인 듯한 사람들과 알 수 없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요즘 뉴욕에서 가장 핫한 연극이라는 영국 출신 극단 ‘펀치 드렁크(Punch Drunk)’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다. 건물은 호텔이 아니라 공연장이고, 건물 안을 배회하는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다. 이들의 행위는 배우들과 함께 펼치는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릴러를 혼합한 무언극 퍼포먼스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관객은 전체 공연의 일부이자 동시에 자신만의 공연을 만든다.

이처럼 관객을 참여시키는 공연을 ‘이머시브 씨어터(Immersive Theater)’라고 한다. 이머시브(Immersive)는 액체에 무언가를 담그거나 몰두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했다. 그래서 이머시브 씨어터를 우리말로는 ‘관객 몰입형 또는 참여형 공연’이라 부른다. 관객을 창작 과정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때문에 즉흥성이 강해 그때그때 공연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무대는 공연장일 때도 있고 생활 공간일 때도 있다. 어쨌든 관객 몰입형 공연의 최대 관심사는 관객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데 있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더 빛나는 공연

최근 ‘이머시브 씨어터’가 세계 공연계를 관통하는 화두가 되고 있다. ‘슬립 노 모어’는 이 열풍을 일으킨 주역이다. 2011년에 공연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 달을 생각했다. 하지만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폐막일을 정하지 않는 오픈런(Open Run)으로 전환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상하이에도 진출해 중국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2017년 가을 대학로에서 열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하얀토끼 빨간토끼’라는 작품이 화제로 떠올랐다. 이 연극은 배우가 작품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르는 ‘황당한’ 설정으로 국내 뿐 아니라 세계 32개국에서 이슈몰이를 했다. 배우로 하여금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대본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장치다. 앞줄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 위에 올라가 토끼나 곰으로 변신해 극에 참여하며, 이머시브 씨어터의 전형을 보여줬다.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극장을 활용해 관객 참여형 공연을 크게 히트시킨 슬립노모어에서 관객들이 가면을 쓰고 배우를 바라보고 있다. ⓒ펀치드렁크

국내 공연작품 중에서는 2016년과 2017년에 공연했던 ‘로드씨어터 대학로 1, 2’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무대는 공연장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대학로’라는 일상의 공간이다. 관객은 ‘햄릿’ 공연을 준비하던 중 연극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삶의 전선으로 돌아간 배우들을 찾아다닌다. 헤드폰으로 나레이터의 안내와 음악을 들으며 마로니에공원, 학림다방 앞, 아르코예술극장 연습실, 대명거리, 낙산 기슭 등을 걷다보면 관객은 어느새 대학로라는 무대 속 주인공이 된다.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헤드폰 색깔로 인해 ‘민트색 대학로’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한 이 연극은 만들어진 무대세트의 화려한 허구성보다는 일상적인 공간이 오히려 관객에게 더 극에 몰입하도록 해 준다.

이 밖에도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삶과 죽음의 미스테리를 그린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 빠이 이상’을 들 수 있다. 블랙박스 극장인 CKL스테이지의 공간을 전면적으로 활용했다. 또 2차 세계대전 말 일제의 만행을 묘사한 ‘난 오늘 당신을 꿈 꿉니다’, 롤플레잉 게임과 백스테이지 투어를 접목한 ‘씨어터 RPG 1.7 -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카바레 뮤지컬 ‘미 온 더 송(Mee on the Song)’, 안무가 차진엽과 영국의 다원예술가 대런 존스턴의 협업 퍼포먼스 ‘미인: MIIN’ 등도 관객의 관심을 받았다.

 

갈수록 멀어지는 관객을 사로잡을 비법이자 자구책

오늘날 대부분의 공연예술은 공연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액자 틀 형태로 된 프로시니엄 무대를 가진 공연장은 무대와 객석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 소위 ‘보이지 않는 벽’ 또는 ‘제4의 벽’을 사이에 두고 관객들은 자신과 다른 공간과 시간에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한다. 관객과 무대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생긴다. 브레히트는 이 거리두기를 더 확실하게 하려고 소격효과라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원래부터 무대와 객석이 분리됐던 것은 아니다. 공연예술의 기원으로 알려진 제의적 행위는 열린 공간에서 이뤄졌다. 풍요를 기원하고 신을 숭배하는 데는 무대와 객석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주로 자연 지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 형식의 야외 원형 극장이 생겨나면서부터 배우와 관객 간에 장소와 역할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무대의 형태로는 앞서 얘기한 프로시니엄무대(Proscenium Stage)를 비롯해 원형무대(Arena Stage), 엘리자베스시대의 단상무대(Platform Stage)에서 기원한 돌출무대(Thrust Stage) 등이 있다. 모두 객석과 무대를 명확히 구분한 형태다. 이런 무대는 제한적 공간으로 인해 소통과 표현에 한계를 띤다. 더구나 기존의 희곡과같이 텍스트로 제한된 틀은 관객에게 일방적인 전달과 수용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거리감으로 인해 기존 공연에서 무대와 관객의 교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이 해체되고 있다. 과거의 관객은 제한적인 공간과 텍스트 중심의 재현을 통한 소통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관객들은 변하고 있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소통방식이 필요해졌다.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다른 엔터테인먼트와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머시브 씨어터는 변화하는 관객들로부터 갈수록 멀어지는 공연계의 자구책인 셈이다.

 

2017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출품된 하얀토끼빨간토끼에서 배우가 토끼 모습을 보이며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SPAF

관객들은 왜 변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술이다.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갈수록 화려한 스펙터클에 익숙하도록 만든다. 아울러 공연예술의 경쟁자들인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들이 기술의 옷을 입고 빠르게 확산중이다. 그 경쟁자들은 스마트폰을 비롯해 N스크린 등을 통해 ‘옮겨 다니며’ 소비자의 손 안에서 ‘유비쿼터스’를 구현한다. 소위 원격현전(Telepresence)도 관객들을 공연장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발전된 기술은 소비자를 엔터테인먼트의 객체가 아닌 주인공으로 대접해준다.

관객들은 가상 공간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과거에 경험했던 단순한 참여를 넘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가시적인 결과를 보고 싶어 한다. 물론 공감각적 감상도 필수가 됐다.

적극적인 참여 욕구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이머시브 씨어터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머시브 씨어터가 더 관객들에게 다가가려면 첨단기술 활용도를 더 높여야 한다. 가령 증강현실 기술 활용은 가상 공간에 익숙한 관객들의 만족도를 올릴 수 있다. 현실에 가상현실을 결합해 관객에게 또 다른 극적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아울러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인책으로 사물인터넷기술을 결합할 수 있다.

 

 

첨단 디지털 기술과 함께할 때 더 성장

‘로드씨어터 대학로’에서는 위치기반 스마트폰 앱을, ‘삐끼ing’ 작품은 SNS를 활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가령 비콘을 활용하면 주변 장소와의 커뮤니케이션 같이 더 다양하고 색다른 체험을 제공할 수 있다. 또 다소 엉뚱할 수 있지만 드론 군집 비행도 관객 참여를 가시화할 수 있는 소재다. 한편 공감
각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남산예술센터의 ‘천사-유보된 제목’처럼 가상현실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이머시브 씨어터를 확실한 아날로그 추구를 통해 제3의 시장을 만들어내는 공연예술 전략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인 공연예술로서는 디지털 콘텐츠와 어설프게 경쟁하기보다 더 확실하게 ‘아날로그’를 추구함으로써 정체성을 살리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머시브 씨어터가 아날로그에 매몰되면 자칫 관객이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발생한다. 가령 ‘천사-유보된 제목’처럼 매 공연이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열리며 하루 최대 관객은 40명에 불과하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의 회당 관객은 80명이고, 심지어 변방연극제 참가작이었던 ‘201호 아인슈타인이 있다’는 회당 관객이 단 6명이다. 공연에 대한 호응이 아무리 좋아도 티켓수입은 기존 공연보다도 작을 수밖에 없어 이른바 공연예술의 ‘비용질병’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위부터) 로드시어터 대학로에서 숨은 배우를 찾아 길을 걷는 관객들. 민트색 헤드폰으로 민트색 대학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뉴스1 로드시어터 대학로에서 물고기 모양 탈을 쓰고 가짜 이벤트 행사를 하며 사탕 나눠주는 배우. ⓒ뉴스1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기술 활용에 있다. 가령 여러 공간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이머시브 씨어터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5G기술과 홀로그램 같은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면 된다. “연극이 지금처럼 한 공간에서 벌어지지 않고 다(多)공간에서 동시에 작동되는 연극이 등장할 것”이라는 이대영 중앙대 교수의 예견은 이머시브 씨어터에서 가장 먼저 실현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첨단기술로 무장한 채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엔터테인먼트들과 경쟁해야 하는 공연예술에서 이머시브 씨어터는 의미 있는 시도다. ‘놀이가 공연이 되고, 공연이 놀이가 되는’ 관객 참여형 공연은 문화민주주의(Culture by All)를 지향하는 시대정신과도 잘 맞는다. 그러나 이머시브 씨어터를 아날로그로의 회귀전략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칫 공연예술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킬 수 있다. 21세기에 공연예술이 디지털 기술의 옷을 입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 기사는 테크M 제65호(2018년 9월)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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