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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세상을 밝힌 ‘직류와 교류’ 미래의 전력망은 어떻게 바뀔까

ECONOMY 경영

2018-05-29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지그문트 슈케르트는 독일의 린더호프 궁전에 전등용 전기를 공급할 목적으로 세계 최초의 화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테크M=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전기 없는 20세기 문명이 가능했을까? 21세기 전기 문명은 전등에서 촉발됐지만, 이후 여러 부분이 상호 강화되면서 전체의 모습을 형성해 갔다. 전기자동차와 전차, 전기로 움직이는 지하철은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전기로 작동하는 엘리베이터 덕분에 고층 빌딩 건설이 가능해졌다. 냉장고와 전기청소기,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 없는 가정을 상상하기 힘들다. 전기 모터를 톱, 드라이버, 송곳, 칼에 부착하면서 전동공구 혁명이 일어났고, 제조업 생산성이 극도로 향상됐다. 무엇보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1등 공신인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의 힘은 본질적으로 전기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영화와 음악은 전기를 통한 재생이 가능했기에 거대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신문, 잡지, 도서와 같은 종이 매체는 전기 모터로 작동하는 윤전 인쇄기 발명 이후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증기 에너지를 통해 1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영국은 전기 생산을 근원으로 하는 2차 산업 혁명에서 초기에는 앞서갔다. 세계 최초의 발전소는 영국에서 1868년 다재다능한 엔지니어 윌리엄 암스트롱(William Armstrong, 1810-1900) 남작이 건설한 민간 수력발전소였다. 호수의 물을 탑에 끌어올린 뒤 다시 내려오는 수압으로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세계 최초의 화력 발전소는 그로부터 10년 뒤 지그문트 슈케르트(Johan Sigmund Schuckert, 1846-1895)가 독일 바이에른 주 린더호프 궁전(Linderhof Palace)과 전등용 전기를 공급할 목적으로 처음 건설했다. 슈케르트는 원래 미국산 싱거(Singer) 재봉틀 수선공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나중에 발전기 개발로 관심이 바뀌었다. 그는 1876년 국가로부터 5만 마르크의 개발 자금을 지원받아 개발에 착수했고, 린더호프 궁전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화력발전 방식이 기존의 여타 발전 방식에 비해 월등히 뛰어남이 밝혀져 화력발전시스템 확산의 선구자가 됐다.

 

에디슨의 성공 비결

2차 산업혁명이 세상을 바꾸도록 한 첫 주자는 아무래도 전등에 돌려야할 것 같다. 전등이 발명되면서 인류는 낮의 길이를 획기적으로 연장시켰다. 전등은 종전의 가스등과 호롱불을 순식간에 대체했다. 전등 확대는 에디슨의 개량된 전구 발명에 기인한 바 크다. 하지만 에디슨에 앞서 이미 스완(Joseph Wilson Swan, 1828-1914)은 1850년대부터 전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860년 진공상태의 탄소필라멘트를 이용한 첫 전구 특허를 영국에서 획득했다. 이후 자신의 방식을 더 개량해 1880년 새로이 특허를 획득했다. 에디슨은 스완의 특허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 자신의 전구 개발에 참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스완의 전구가 세상에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전구 자체의 점등 수명과 밝기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전구를 전력 시스템과 결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스완이 전구를 개발했을 당시는 화력발전소 시스템이 막 등장했던 시기였다. 발전시스템이 충분히 확산되기 이전이었다는 한계도 있었다. 반면 에디슨은 자신의 조명 시스템과 연결된 직류 방식의 발전 및 송전 시스템까지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자신의 전구를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에디슨이 펄스트리트역에 건설한 일명 ‘점보(Jumbo)’ 발전기

에디슨은 1880년 최초로 상업적으로 자신의 조명 시스템을 선보였다. 1881년에는 에디슨의 이 실험을 눈여겨 본 미국기업 케첨(Ketchum & Company)이 자신의 공장에 에디슨의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뉴욕시의 펄스트리트 역(Pearl Street Station)의 거대한 발전기에 연결된 배전과 조명 시스템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발전기는 총 6대가 설치됐는데 대당 무게는 27t, 발전 용량은 100㎾(킬로와트) 급이었다. 이 6대의 발전기는 총 1400대의 전구를 밝힐 수 있었다. 펄스트리트 역에서 성공한 이후 에디슨은 브록턴, 메사추세츠, 선베리, 펜실베니아 등지에 자신의 발전과 조명 시스템을 추가로 건설했다.

초기의 전력 수송은 기본적으로 사용 지점 인근마다 발전기를 두는 방식이었다. 공급 범위는 발전기로부터 반경 100m 정도에 한정됐다. 초기에는 송전 거리를 연장시키면 전선의 단면적이 거리에 비례해서 늘어나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도 있었고, 실제로 거리가 늘어날수록 송전 과정의 전력 손실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82년 뮌헨 전기 박람회에서 57km 떨어진 화력식 직류발전기로부터 박람회장까지 송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박람회장에서는 모터식 인공폭포에 전기가 공급되면서 작동되는 장면이 시연됐다.

전력 수송은 처음에는 전신주를 통한 전선의 고공 가설 방식을 주로 따랐다. 이후 지중매설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전신주 방식은 설치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확산됐다. 전신주는 너도밤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등이 주로 사용됐고, 전신주 사이에 절연용으로 사용된 애자는 유리나 도자기가 주재료였다. 전신주를 통한 송전은 발전소로부터 시가지까지 오는 과정에서는 야산과 하천을 거쳐 오면서 사람들의 생활에 큰 불편을 야기하지 않았지만, 막상 시가지에서는 혼잡의 원인이 됐다. 그래서 시중에서는 지하에 전선을 매설하는 방식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직류와 교류 방식의 싸움

송전 과정에서 유명한 사건이 바로 직류와 교류 방식 간 싸움이었다. 에디슨이 개발한 발전과 송전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직류 방식이었다. 직류식은 거리를 연장하기 위해 3선식을 채택했다. 3선식은 1본을 중성선으로 해서 전류가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고, 다른 2본을 전류가 흐르도록 하여 전선의 단면적으로 작게 하면서 소요 구리량을 줄일 수 있었다.

에디슨은 1880년 최초로 상업적인 조명 시스템을 선보였다.

 

교류 방식에 의한 송전시스템은 영국의 페란티(Sebastian Ferranti, 1864-1930)가 단상  류 방식을 채용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런던 교외의 메트포드에 1000㎾급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자신의 방식을 선보였다. 이 방식은 송전 시 전력 손실이 직류 방식에 비해 월등히 적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력 장치에 연결하면 기동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후 전기회사 웨스팅하우스는 교류의 대변자가 됐고 에디슨은 직류의 옹호자로 남아서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당시 에디슨 측의 어떤 인물은 교류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전기 사형(死刑)에서 교류를 사용하도록 입법을 유도한 뒤 사형당하는 사람의 끔찍한 장면을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수단을 쓰기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독일 AEG의 엔지니어 도부로보리스키(1862-1919)가 3상 교류 기술을 개발하면서 월등한 송전 효율을 보이는 것이 입증되면서, 이 대결은 결국 교류 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189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개최된 국제 전기박람회에서, 170km 떨어진 3상 교류 발전기로부터 75.2%라는 탁월한 효율로 송전이 가능함을 보였다. 이후 보다 많은 전기제품이 교류 방식을 채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유경쟁 대 계획통제

19세기말은 유럽과 미국 각지에 지역별 군소 민간 발전소가 마구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전력 공급 능력은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다. 배전된 전압이 낮아져서 전등이 소등되는 일이 잦았다. 수많은 상인과 의사들이 전구 대신 예전의 가스등을 찾기 시작했다. 만찬 모임이 있거나 가연성 소재를 다루는 상점의 경우 가스등으로 대체하는 일은 아주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의사들이 수술 중 전등이 나가면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발전회사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 런던에서는 1900년 초 북부 지역의 상인과 의사들을 포함한 600명이 청원단을 구성해 발전회사에 대한 고소를 합법화할 것을 의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청원단 대표 36인의 민원을 접한 의회 통상위원회 의장 리치(Richie)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보수당 소속이었던 그는 발전소 간에 경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지역에 신규 발전소를 더 세워서 경쟁을 촉진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발전소들이 느끼는 문제점은 시설 투자와 연료비 때문에 발생하는 고비용 구조였다. 소규모 발전소일수록 고정비 부담이 장애가 됐다. 그들은 규모의 확장만이 해법이라고 생각했다. 즉,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군소 발전소들이 더 들어와서 경쟁이 활성화되는 것은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군소 지역 발전소가 난립하면서 연기와 발전기 진동으로 지역주민의 고통도 배가됐다. 이는 작은 발전소들이 근거리 송전에만 의지하다 보니 주로 이용자가 밀집한 시가지에 설립돼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이용자라고 하는 것도 대부분 병원이나 상점과 같은 자영업자들이었다. 일반 가정에는 대부분 전구가 보급되지 않았다. 1900년 당시 영국 전역을 통틀어 전력망에 연결된 일반 가정은 5만 가구에 불과했는데, 이는 영국 전체 가구의 0.7%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영국 런던 북부의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지역 발전회사들의 공급 능력을 전혀 믿을 수 없고 공급 가격도 너무 비싸다는 비판 기사를 게재하곤 했다. 이런 문제가 지속되면서 결국 군소 지역이 아니라 다수의 지역을 포괄하는 대규모 발전소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21년 미국의 전기엔지니어 머레이(William S. Murray, 1873-1942)는 이른바 슈퍼발전소(Superpower) 네트워크 구상을 제시했다. 5개년에 걸쳐 매년 9000만 달러를 투자해서 수천마일의 고압송전선망을 보스톤과 워싱턴DC를 잇는 전체 지역에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군소 발전소가 가동되는 것에 비해서 자신의 슈퍼발전소 네트워크가 약 40%의 전력생산 및 운영비용을 절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주장은 당장 지역 군소 발전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정치 이념에 따라서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대개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인들은 발전소의 대형화 심지어 국유화를 찬성했던 반면, 보수당이나 자유주의 쪽은 그 반대편에 섰다. 영국에서는 절충으로 발전연합(JEA: Joint Electricity Authorities) 같은 어정쩡한 형태의 협력 기구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운영은 원활치 않았다.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공방 끝에 결국 정부 주도 하에 전국의 발전 사업체들을 재편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에 제정된 전기법(Electricity Act)에 따라 중앙전기위원회(CEB: Central Electric Board)가 구성되고 전국을 9개의 독립된 전기공급 권역으로 분할했다. 발전소 간의 전압과 각종 규격을 통일시켰다. 이들 권역이 전국적으로 연결되면서 국가 전력망이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발전소 간 잉여 전력과 부족 전력은 서로 교환할 수도 있게 됐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영국 전역에 발전소들이 건설됐고 지역별 전선 통과권과 송전망 구축이 이뤄졌다. 발전소들은 건설에 필요한 철강재 및 가동에 필요한 석탄을 수송, 하역하기 용이한 하천의 요지에 주로 건설됐다. 1930년대 대공황에도 영국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함으로써 불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이런 경험이 미국과 세계 각지에 확산되면서 전력 산업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한동안 국영사업이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됐다. 20세기의 전력망 확산은 같은 시기 여타 신기술 확산 과정과 달리 소수의 영웅적 경영자보다는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특색이다.

1930년대 이후 국가 주도의 전력망 형성은 자유경쟁이냐 계획통제냐 하는 경제이론간 대결에서 후자가 승리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는 그 주된 논거였다. 거의 한 세기를 거친 후 21세기 전력망은 다시 자유경쟁과 다양화의 시대로 복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태양광이나 풍력 등 화석연료에 대한 대체 에너지 원천이 속속 확산되고 사업장이나 가정에서 전력을 자체 생산하는 비중도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부상하기 시작한 지능형 전력망(Smart Grid)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정부가 솔선하고 있지만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반의 자율적인 수급을 지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계획통제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 글은 테크M 제61호 (2018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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