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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블록체인, 양지로 나온 무정부주의

COLUMN 미래의 눈

2018-03-28정지훈 다음세대재단 이사

블록체인의 사회적 메시지와 사상, 그리고 경험은 지난 30년간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테크M =정지훈 다음세대재단 이사]  2016년부터 인공지능이 미래를 바꿀 기술로 급부상 하더니, 2017년 하반기 부터는 블록체인 기술을 중심으로 한 암호화폐와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실 지난 수십 년 간 점진적으로 축적되었던 에너지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측면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탄생시킨 철학과 앞으로 이런 철학이 기반이 된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중앙 집중적인 금융 기관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후 불거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킨 당사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이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미국 정부가 내린 정책적 결정 등에 분개한 엔지니어들이 기존 암호화 기술과 분산컴퓨팅 등 다양한 기술들을 조합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단순히 금융 혁신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엔지니어들이 이런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기까지는 지난 수십 년 간 이어온 도도한 사상적 흐름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 시스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 원류는 1950년 발간된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의 책 ‘인간의 인간적 활용: 사이버네틱스와 사회(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책과 사이버네틱스를 논하려면 인공지능이나 현대 인터넷, 그리고 대항문화(Counter Culture)까지 다뤄야 하기 때문에, 이정도 선에서 언급을 마칠까 한다.

이후 1989년 전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전 세계로 퍼져나간 사이버펑크(Cyberpunk) 관련 문화가 블록체인 기술에 담긴 철학과 보다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1989년 텍스트로 인터넷을 하던 시절, 아직 웹은 탄생도 하지 않았을 당시 ‘아 유 시리어스(R. U. Sirius: 발음  Are you serious?)’라는 인물이 몬도 2000(Mondo 2000)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미래학자이자 SF소설가로 유명한 사이버펑크의 대가 윌리엄 깁슨도 즐겨봤다는 이 잡지는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보여줄 미래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였다. 아 유 시리어스는 1992년 몬도 2000을 같이 집필하던 세인트 주드 미혼(St. Jude Mihon)과 함께 창조적인 해커들이 세상을 변형하고 지배하는 세상을 소재로 한 SF소설을 쓰고 있었다.

책에서 그는 암호화를 활용해 해커들이 자유를 확보하고 정부의 감시에서 벗어난다는 설정을 그렸다. 이런 설정을 이야기하면서 에릭 휴즈(Eric Hughes), 존 길모어(John Gilmore), 팀 메이(Tim May)와 함께 다양한 사이버펑크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팀 메이는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을 흉내낸 암호화무정부주의자선언(The Crypto Anarchist Manifesto)이라는 것을 쓰기도 하였다. 암호화무정부주의자선언을 통해 팀 메이는 암호화된 무정부주의자인 스펙터(Specter)가 등장하고, 암호화된 통신과 익명성을 가진 온라인 네트워크가 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서 경제활동을 통제하고, 정보들은 비밀리에 유지되는 상황을 묘사했다.

당시 암호화 기술을 중심으로 한 이런 문화는 네트워크가 확대될수록 정부와 같은 빅브라더의 통제가 커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탈출구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반 다양한 암호화 기술에 심취한 해커들은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기도 했다. 그 중 유명한 인물 중 하나가 현재 와이어드의 수석기자로 해커 선언문과 ‘해커스’란 책을 쓰기도 한 해커문화의 대가 스티븐 레비(Steven Levy)이다.

존 길모어는 암호화 관련 다양한 문서들을 사람들에게 배포했는데, 이 때 미국 국가안보국 (NSA)에서는 존 길모어를 방첩법(Espionage Act,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보안법쯤 된다) 위반으로 잡아들이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존 길모어는 이같은 사실을 세상해 공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필 짐머만(Phil Zimmermann)이 개발한 PGP(Pretty Good Privacy)는 당대 최고의 암호화 소프트웨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사이버펑크에 열광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됐고 비상업적 용도로 오픈소스로 완전 공개됐다. PGP는 알고리즘 자체는 전혀 몰라도 누구나 간단히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됐다. 암호화된 메시지와 데이터를 네트워크를 통해 안전하게 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클린턴 행정부는 1993년 4월, 암호화와 관련한 정책을 발표한다. 클린턴 정부는 NSA에서 안전한 음성통화를 위해 개발한 암호화 칩셋인 클리퍼 칩(Clipper Chip)을 공공부문이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클리퍼 칩은 암호화 알고리즘이 공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백도어를 통해 정부가 다양한 감시와 감청을 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나섰던 집단들도 사이버펑크 운동을 주도했던 존 길모어 등이다.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클린턴 정부의 시도는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부 등이 주도한 중앙집중적이고 통제 가능한 상황을 산업계와 개인들이 자율적인 선택으로 네트워크에서의 자유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후 등장한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나 NSA의 기밀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과 같은 이들도 암호화를 이용해 빅브라더와 충돌한 무정부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블록체인 혁명의 핵심적인 사상의 원류는 이런 역사적 사건들과 맥이 닿아 있다. 블록체인이 그전에 있었던 암호 기반 무정부주의적 활동과 크게 다른 점은 음지가 아니라 양지로 나왔다는 점이다. 단순히 해커들만의 문화가 아닌 주류 문화로서 기존 사회와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록체인이라는 인터넷 기반 인프라는 이런 사상의 전파를 더욱 쉽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오픈소스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양지에서 분산화된 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개발자 집단의 경험과 문화가 더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각종 산업 및 사회 시스템에 빠르게 적용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블록체인을 단순히 기술로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이나 찾으면 된다는 식의, 다시 말해 블록체인을 특정 산업의 테두리로 묶으려는 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블록체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와 사상, 그리고 경험은 최소한 지난 30년 간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그 이상으로 거대한 문제점도 부각시켰다. 이제는 이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가기 위한 젊은 혁명가들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다.

현재 상황은 산업혁명 초기 자본주의가 정립되고, 그리고 50년 뒤에 공산주의 이론이 등장하고, 이게 다시 사회 변혁의 씨앗이 되면서 근대 국가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와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산업혁명은 단순히 산업만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수 많은 사상과 사회적 믿음도 바꿨고, 거대한 소용돌이와 변혁, 투쟁과 타협 등을 통해 100년 이상 단련이 되면서 강고한 틀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고 한다. 기술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읽고, 우리가 믿고 있는 상당 수의 것들이 과연 진실로 옳은 것인가를 반문하고, 현재 주어진 변화의 씨앗을 접목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봐야 한다.

<본 기사는 테크M 제59호(2018년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