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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 정보욕구와 기술혁신의 척도, 신문의 미래

2017-07-31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테크M=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오늘날 신문은 일상이다. 수많은 일상의 사물이 그렇듯 신문도 혁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거창한 프로젝트로 태어난 혁신이 아니었다. 역사 이래 인간이 늘 해왔던 일을 약간 다른 형태로 시도한 것에서 작게 출발했다.

 

중세시대의 편지와 뉴스

  뉴스레터(Newsletter)라는 단어가 있다. 16세기까지 지역 또는 해외에서 일어난 소식은 대개 편지의 형태로 전달됐다. 이송 수단으로 기껏 도보, 마차, 비둘기, 선박 등이 활용됐을 뿐이다. 기술적으로는 필사에 의존했을 뿐 아니라, 작성 시기도 필요에 따라 부정기적인 것과 정기적인 것이 혼합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힘입어 정기적으로 인쇄되는 소식지가 등장했다.

  1605년 신성로마제국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판업자 카롤로스(Johann Carolous)가 주간지 ‘렐라치온’을 발행했다. 이 소식지가 바로 역사상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말이 신문이지 요즘 기준으로 보면 A4보다 작은 크기의 팸플릿에 불과했다. 이 신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17세기 내내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영국에 이를 모방한 신문들이 속속 등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조금 늦었다. 17세기 미국 이주민들은 신대륙의 거친 환경에서 당장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다. 영국에서 친 휘그당 성향의 신문을 발간했던 벤저민 해리스(Benjamin Harris)는 인권과 프로테스탄트 보호에 대한 과격한 논설이 문제가 돼 폭동 교사죄로 투옥됐다. 그는 석방된 뒤 미국으로 도망쳤다. 보스톤에서 출판사를 설립해 책을 내다가, 1690년 4페이지 짜리 작은 월간 신문 퍼블릭어커런시즈(Public Occurunces)를 발행했다.

  메사추세츠주 당국은 이 신문이 허가를 받지 않았고 내용도 영국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발행 중지를 명령했다. 그래서 미국 최초의 이 신문은 불행하게도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스코틀랜드 출신의 보스톤 우편국장 존 캠벨(John Campbell)은 보스톤 항을 드나드는 선장과 우편배달부들로부터 뉴스를 수집해 만든 필사본 레터를 유력 인사들에게 유료로 배포했다. 부수가 점점 늘어나자 1704년 인쇄본으로 전환했는데 이것이 주간 보스톤 뉴스레터였다. 이는 미국에서 최초로 연속 간행이 이뤄진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최초의 신문, 렐라치온(Relation)

  당시만 해도 신문은 아직 대중적이지 않았다. 상류층에서나 구독하는 사치재였다. 대중의 독해력과 경제력은 아직 신문을 볼 수준이 아니었다. 보스톤 뉴스레터의 1부당 2펜스, 연 구독료 12실링이란 가격도 먹고 살기 힘든 평민 노동자 입장에서는 선뜻 지불하기 힘든 것이었다.이후 보스톤에서는 유사한 성격의 신문이 속속 등장, 미국 신문의 발상지가 됐다. 이어서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1719년 ‘아메리칸 위클리 머큐리’가, 뉴욕에서 1725년에 ‘뉴욕 가제트’가 창간됐다.

  유럽에서는 17세기 내내 모든 신문이 주간으로 발행됐다. 1702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으로 1면짜리 일간 ‘데일리 쿠런트’가 등장했다. 미국 최초의 일간지는 그보다 늦은 1783년 발간된 ‘펜실베이니아 이브닝 포스트’였다. 일간 신문의 등장은 신문의 역사에서 유지형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개선 하나가 이뤄지는 데 무려 100년이 걸렸다.

   

신문 성장을 이끈 기술 혁신

 신문 산업이 콘텐츠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방면의 기술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장 큰 공신은 인쇄 기술이었다. 신문 자체가 필사를 인쇄로 대체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창기 신문발행인은 대부분 출판사업자였다. 당시에는 인쇄사업자와 출판사업자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인쇄사업자가 신문발행을 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도 유년기에 인쇄공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고 필라델피아에서 신문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7~18세기 신문 인쇄 기술은 15세기 개발된 구텐베르크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 수동식 목재 기계였고 고장이 잦았다. 활자판에 잉크를 바른 뒤 솔로 두드려 인쇄하는 방식이었는데 숙련된 인쇄공의 경우 한 시간에 200면 가량을 인쇄할 수 있었다. 1811년 독일 프리드리히 쾨니히(Friedrich G. Koenig)는 증기로 가동되는 고속 실린더 인쇄기를 발명했다. 이 기계는 한 시간에 무려 1100페이지를 인쇄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네이피어와 리처드 호는 이를 더욱 개량한 윤전기를 발명했다. 이후 개량을 거듭해 1870년경에는 시간당 1만 8000부 이상의 신문을 찍어낼 수 있게 됐고 다양한 보완 기술 혁신이 이뤄졌다. 1886년 오트마르 머건탈러가 자동주조 식자기를 개발, 1분에 다섯 식자판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연속 간행이 이루어진 최초의 신문, 보스톤뉴스레터

  인쇄 속도가 급속히 높아지자 대량 인쇄를 통해 신문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이때부터 오늘날과 같은 신문 산업, 그리고 그 형제격인 잡지 산업의 골격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또한 18세기 말부터 장망식(Fourdrinier) 제지 기술이 발달했고, 1830년에 종이 생산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됐다. 또한 염소가 표백제로 개발되면서 건초나 밀짚, 못 쓰는 천조각도 신문 용지로 탈바꿈하게 됐다.

 

1870 리처드호 윤전기쾨니히의 고속실린더 인쇄기

  수송기술은 고객확대가 큰 역할을 했다.19세기에는 철도가 20세기 초반에는 자동차가 마차를 대체하면서 수송 용량과 속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접근 가능한 독자의 범위도 늘었다. 특히 1차 대전 후에는 항공기가 우편물 수송 수단으로 활용돼 전달 범위와 속도가 한 차원 향상됐다.

  이처럼 기술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지기 전, 신문의 발행부수는 생산능력이나 시장 규모 면에서나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중반 미국 보스톤에서 발행된 4대 주요 신문의 평균 발행 부수는 600여 부에 불과했다. 미국에 거주 백인 가구 중 단 5%만이 신문을 구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 기술 발전을 통한 생산비 절감으로 1833년 발행된 뉴욕선은 기존 신문 값의 6분의 1에 불과한 1센트로 신문을 팔 수 있게 됐다. 1835년에 창간된 뉴욕헤럴드(The New York Herald)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껏 매일 4000부 정도를 판매할 수 있었던 여타 신문사를 제치고, 3~4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후 신문은 비로소 거대 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의 일간지 르쁘띠주르날(Le Petit Journal)은 역사상 최초로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은 고객에 봉사하는 것

  오늘날까지 신문 1면이 정치면인 이유는 17세기 태동기 이래 유럽과 미국의 신문이 정치 뉴스를 알리는 데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신문은 태생부터 정치적이었다. 단지 사실만 전달하고 일체의 의견을 배제하는 신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치 노선과 지지 정당에 따라 색채가 갈렸다. 미국 독립투쟁 기간 중 필라델피아 신문들은 독립당파와 친 영국 왕당파로 양분됐다. 이들은 대중 선전을 신문 발행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런 경향은 신문이 늘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신문 콘텐츠의 방향에 또 다른 혁신을 일으킨 사람은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였다. 헝가리 출신으로서 군인이 꿈이었던 그는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남북전쟁시 북군에 자원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신문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언론인으로서 타고난 강점을 발휘하면서 기자로 승승장구했고 결국 신문 발행인으로 대성했다.

 

신문왕 퓰리처

  퓰리처는 1878년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St. Louis Post-Dispatch)를 통해 신문이 정당이 아닌 시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철학을 천명했다. 신문 콘텐츠는 시민을 즐겁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독자들은 그에 화답했고 퓰리처는 거부가 됐다. 그가 죽은 뒤 유지에 따라 퓰리처상이 제정됐고, 대학에 신문학(Journalism)이 정식 전공으로 자리잡았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2013년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했다. 그가 편집국을 상대로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은 오랜 세월 익숙해 있는 독자(Reader)라는 단어 대신 고객(Customer)이라는 개념으로 사고하라는 것이었다. 인터넷과 SNS 시대에 종이 신문의 쇄락은, 어쩌면 500년 ‘독자’ 프레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문은 변신할 뿐이다

  17세기 이래 유럽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커피 하우스에 모여서 신문을 읽으며 시사를 토론했다. 그 사이 판형, 지면 구성, 콘텐츠의 영역은 점진적으로 진화해왔다. 동시에 신문이 누렸던 원초적 지위는 라디오, TV, 컴퓨터 같은 전송수단으로 하나씩 대체해왔다. 오늘날 커피 전문점에서 사람들은 신문 대신 모바일 기기나 노트북으로 뉴스와 정보를 검색하며 의견을 교환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신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키보드가 등장했다고 연필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신문이 멸종될 일은 없다. 정보에 대한 인간 욕구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복잡다단해질 것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신문은 고객의 정보 욕구를 채우는 수많은 매개체 중 하나 정도로 남을 것이다. 신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신할 뿐이다. 지금까지 신문의 대체재로 알려진 모든 것들도 사실은 신문이 몸을 약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처음 신문이 등장했을 때에도 편지가 변신한 것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문헌

엘리엇 킹 지음, 김대경 옮김, ‘무료신문: 인터넷은 저널리즘을 어떻게 바꾸었나’,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차배근, ‘미국신문발달사: 1690-1960’,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위키피디아의 ‘Newspaper’ 등 관련 항목


각주

1.전신과 라디오, TV, 인터넷을 통한 뉴스 전파는 신문과는 별개의 경로로 탄생했다. 하지만, 모두 융합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문, 방송, 통신 사업자는 항상 서로 넘나들면서 이들 매체를 통합 운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2. 차배근, 앞의 책, p.52.

3.Pennsylvania Journal, Pennsylvania Gazette, Pennsylvania Packet

4 Pennsylvania Evening Post, Pennsylvania Ledger, Royal Pennsylvania Gazette


 

 

<본 기사는 테크M 제51호(2017년 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