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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전선도 없는데 방송이?” 라디오 혁신에서 본 유튜브의 미래

2017-06-17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테크M = 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유튜브(youtube.com)에는 튜브, 즉 진공관이 없다. 대신에 튜브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진공관이 등장하기 전에는 광석(crystal) 라디오가 사용됐다. 광석 라디오는 전원이 없어도 작동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출력이 미약해서 이어폰을 착용해야만 들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라디오 수신사는 큼지막한 장비 앞에서 이어폰을 끼고 앉아 모르스 신호를 들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발명가 리 드 포리스트(Lee De Forest, 1873-1961)가 3극 진공관을 발명했고, 1907년에 특허를 등록했다. 진공관이 등장하면서 신호 증폭과 전송 거리의 한계가 극복됐다.

장거리 송신은 물론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기술 변화 덕분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방송을 듣는 것이 가능해졌다. 진공관 라디오가 등장하면서 라디오는 비로소 사유재에서 공유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조사위의 탄식 

초기 라디오 산업의 형성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이다. 모든 혁신적 신기술이 대부분 그렇지만 라디오도 초기에는 지극히 제한된 용도로 특수한 집단에서만 사용됐다. 일반인은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1897년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코니(Gugliemo Marconi, 1874-1937)는 영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6㎞나 떨어진 곳에서도 라디오 전신의 송수신이 가능함을 시연했다. 사람들은 전대미문의 이 신기술이 영국 연안에서 조난 상황에 처한 선원들을 구조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1899년에 등대선 구조에 성공했다.

 

 

라디오 기술이 돈과 생명을 구하는 데에 활용되기 시작하자 런던의 로이드(Lloyds) 보험사는 대상 선박에 이 새로운 기계를 장착할 것을 지시했다. 1900년 경에 이르러서 마르코니의 전신기는 대부분의 대형 선박에 장착됐고, 모르스 부호를 해독할 수 있는 전문 무선사가 함께 승선했다.

1912년 어느 봄, 타이타닉호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처녀 출항했다. 마침 대서양 중간 지점쯤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송신처가 영국이 도달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미국 동북부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지역으로 바뀌는 곳이었다. 마르코니 전신회사 소속의 무선사는 승객들에게 전달할 뉴스와 주식 시세 보고서를 거대한 광석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받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타이타닉호로부터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운항 중이던 캘리포니안호의 무선사가 다급하게 타이타닉호와 접선하려고 시도했다. 위험한 빙산이 있는 지역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뉴펀들랜드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들으려고 집중해 있던 차에 캘리포니안호로부터 간섭하는 통신이 들어오자 타이타닉의 수신사는 그를 향해 송신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일을 마친 수신사는 자신의 선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닥칠 비극 따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청문회장에서 심문관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수신사가 한 시점에 오직 한 가지밖에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때문에 캘리포니안호로부터 날아온 경고 메시지에 대해 제발 방송 끄고 좀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미국 상원의 진상조사위원회는 단 몇 분만이라도 더 캘리포니안호의 송신이 이어졌다면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타이타닉호 사건으로 1912년 라디오법(Radio Act of 1912)이 제정됐다. 모든 선박은 해상 재난에 대비해 24시간 내내 라디오 신호를 모니터하는 것이 의무화됐다. 그리고 그 어떤 라디오 시스템도 다른 종류의 라디오 시스템의 작동을 방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 법은 마르코니가 전파라는 공공재를 특허로 독점하고 있었던 데에 대한 공격이었다. 독점은 대개 기술 발전을 저해한다. 당시 마르코니의 발명은 이미 낡은 것이 되고 있었고, 당시의 유능한 발명가들은 보다 개선된 기술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르코니의 독점력 앞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업화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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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변화 덕분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방송을 듣는 것이 가능해졌다. 

진공관 라디오가 등장하면서 라디오는 비로소 사유재에서 공유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모르스 부호에서 라디오폰으로 도약 

마르코니에서 촉발된 라디오 기술은 이후 수많은 관련 기술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리 드 포리스트의 진공관 기술도 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라디오를 특수 전문가의 취급품이 아니라 대중의 문화 상품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했던 획기적인 기술은 바로 라디오폰(radio phone) 기술이었다. 당시 라디오폰 기술의 등장은 개인용 컴퓨터로 치자면, 텍스트 콘솔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로 바뀐 것만큼이나 혁명적이었다고 해석된다.

 

 

타이타닉호 사건이 발생하기 한참 전이었다. 1906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미국 남동부 매사추세츠주 코드곶(Cape Cod) 근처의 선박에서 라디오로 모르스 신호를 듣고 있던 무선사들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라디오로부터 바이올린 연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 구절을 읽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나다 출신의 라디오 기술자였던 레지날드 페센덴(Reginald Fessenden, 1866-1932)은 수년간, 모르스 부호가 아니라 음성을 직접 보내겠다는 목표를 잡고 연구를 진행해 왔었다. 그는 마르코니의 방식과 전혀 다른 연속파(continuous wave) 방식에 집중했다. 재력가의 후원을 받아가면서 마침내 연구를 성공시켰고, 매사추세츠주 브랜트 로크(Brant Rock)에 송신기지를 건설했다.

 

레지날드 페센덴

 


기술에서 사업으로, 제품에서 문화로

1906년에 최초로 음성 전송기술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상업방송으로, 더 나아가 20세기 인류의 문화 자체를 바꾸는 하나의 인프라로 정착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기술 사업화를 통해 인류의 삶이 통째로 바뀌게 되는 과정에는 항상 탁월한 경영자가 한 두 명쯤 거론된다. GE의 찰리 코핀, IBM의 토마스 왓슨,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이 친숙한 이름들이다. 그들은 기술의 속성을 잘 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기술 자체는 뒤로 두고 사람들의 숨은 욕구, 즉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꿰뚫어볼 줄 알았다.

라디오에서는 러시아 출신 미국 이민자였던 데이비드 사르노프(David Sarnoff, 1891-1971)가 바로 그 역할을 했다. 라디오 확산의 역사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사르노프야말로 라디오를 특수한 선박용 통신장비 내지 1차 세계 대전 중 군사용 통신장비로서가 아니라 대중의 생활필수품으로 탈바꿈시킨 일등공신이라고 할 만하다.

 

데이비드 사르노프

 

그는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회장으로서 라디오뿐만 아니라 훗날 흑백 및 컬러 TV 사업화를 주도했고, AM방송의 기틀을 마련하고 NBC 방송사까지 경영했던, 말하자면 20세기 방송사업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었다.

마르코니 전신회사의 직원이었던 1910년대 중반 어느 날 마르코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제 계획은 라디오를 피아노나 축음기처럼 ‘가정필수품’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선 없이 집집마다 음악을 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전선으로 그걸 하려고 했지만, 전선은 이 용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라디오로 그것이 가능합니다.” 

훗날 세상 모든 가정의 책상마다 컴퓨터를 한 대씩 들여놓겠다고 꿈꾸었던 빌 게이츠와 완벽히 일치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꿈은 완고한 마르코니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그 해, GE 주도로 당시 전기회사들이 연합해 RCA가 설립됐다. 마르코니 전신회사를 떠나 RCA에 입사한 사르노프는 승진을 거듭한 끝에 이내 회장이 됐다.

RCA는 우후죽순처럼 널려있던 라디오 수신기 제조사들의 특허를 모두 사들였다. 1920년대에는 RCA로부터 라이선싱을 받아야만 라디오 수신기를 제조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RCA는 오늘날 비실시기업(NPE), 속칭 ‘특허괴물(patent troll)’과 같은 역할을 이미 수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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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의 찰리 코핀, IBM의 토마스 왓슨,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은 기술의

속성을 잘 알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숨은 욕구, 즉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꿰뚫어볼 줄 알았다.

라디오에서는 러시아 출신 미국 이민자였던 데이비드 사르노프가 그 역할을 했다. 

 

1920년대는 라디오 열풍의 시대였다. 마치 1990년대가 닷컴 기업 붐이었던 것과 같았다. 1921년에 미국 라디오용 진공관 생산량은 한 달에 5000개에 그쳤지만, 1922년에는 월 20만개로 폭증했다. 1930년 무렵에는 월 1억 개를 넘었다.

 

 

기계가 어느 정도 보급된 다음부터는 라디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방송 콘텐츠 사업 붐이 일었다. 1927년 미국에는 700개 이상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다. 사람들이 방송의 효용에 눈뜨기 시작하고 거대한 시장이 열렸다.

주파수 할당과 방송 검열처럼 정부가 산업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면허를 지닌 소수 공급자로부터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일방향 송신만이 허용된다는 기술적 특성 때문에 언론은 1940년대 이후 정치 프로파간다의 핵심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그랬고 일본이 그랬다.


유튜브에는 튜브가 없다 

1906년 음성 전송 라디오 기술이 처음 등장한지 정확히 100년이 지난 뒤 튜브는 전혀 다른 형태로 재등장했다. 플랫폼이라는 형태를 띠고 유튜브가 등장한 것이다. 유튜브는 모바일 기기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화학적 결합을 하면서 다수의 정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공유와 쌍방향 소통의 철학이 복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이다. 이 기술을 통해 인류가 단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외에도 각종 재난과 위해로부터 보호받으면서 보다 질 높은 삶을 영위하는 단계가 되려면, 21세기 어느 시점엔가 또 다른 사르노프가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본 기사는 테크M 제50호(2017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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