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TECH M

3D프린팅, 새 예술 생태계의 계기

2017-05-28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테크M = 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일찍이 3D프린팅이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정확한 예측도 그렇거니와 더욱 놀라움을 주는 것은 그 확산 속도다. 문화예술 분야에 부는 3D프린팅 열풍도  만만치 않다.

우선 디지털 복원에 사용되는 3D프린팅 사례를 보자. 디지털 복원은 유무형의 문화재를 컴퓨터 그래픽, 가상현실 등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본 모습대로 복원해내는 작업이다. 이 디지털 복원작업에 최근 3D프린팅이 사용되며 각광받고 있다.

입체적인 측정을 통해 보다 완벽한 복원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럽 ‘디지털 문화유산 초기 교육 네트워크(Initial Training Network for Digital Cultural Heritage, ITN-DCH)’의 ‘프로젝트 모술(Project Mosul)’을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수니파 무장조직 IS가 훼손한 이라크 모술 박물관의 소장품을 복구하기 위해 3D프린팅 기술을 적용하겠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크라우드소싱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를 토대로 최신 3D 사진측량 기술을 사용, 유물의 실제 모습을 가상으로 구현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밖에도 3D프린팅을 복원에 활용한 사례는 많다. 프랑스에서는 선사시대 벽화로 유명한 쇼베 동굴을 3D스캐닝 기술로 복제한 동굴이 일반에 공개돼 큰 관심을 끈 바 있다. 이탈리아의 건축 디자이너 안드레아 파치아니(Andrea Pacciani)는 문헌으로만 남아있던 17세기의 장식품을 3D프린터로 복원했고, 영국에서는 ‘팩텀 아트(Factum Arte)’라는 유적 재현 사업이 진행됐다.

이집트의 대표적 유적지, 투탕카멘의 무덤이 너무 많은 관람객으로 인해 훼손되자 관리 당국은 무덤 공개를 중단하게 되는데, 그 대안으로 추진했던 프로젝트가 바로 3D프린터를 활용해 무덤 전체를 재현하는 ‘팩텀 아트 프로젝트’다. 새롭게 재현된 무덤 모형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실제 무덤에 들어가지 않아도 무덤 내 구조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3D프린팅이 만든 패션

문화산업에도 3D프린팅이 대세다. 3D프린터로 피규어를 만드는가 하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하고, 의상을 만들기도 한다.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은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피규어에 대한 수요가 높다. 그런데 값이 만만치 않다. 피규어의 특성상 하나하나 수작업을 거쳐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이 가능해 대안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 3D로 구현해 낸 피규어다.

애니메이션 제작기법 중 하나인 클레이 애니메이션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일일이 손으로 빚어 만든 모형으로 구현하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3D프린팅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헤르펜(Iris Van Herpen)은 신소재를 활용해 예술품 수준의 의상을 3D프린터로 만들어 선보였다. 또 지난해 미국의 ‘너브스 시스템(Nervous System)’은 3D프린터로 옷을 출력한 뒤 입으면 착용자의 체형에 맞게 옷이 스스로 형태를 바꾸는 여성용 의류로 화제를 모았다.

 

 

해외 미술계를 보자. 유럽 현대미술을 이끄는 파리의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에서는 올해 3월, ‘세계를 프린팅하라(Printing the World - Imprimer le Monde)’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디지털 기술, 특히 3D프린팅을 핵심 키워드로 하는 전시회였다.

예술가와 디자이너, 건축가 등 30여 명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모여 3D프린팅으로 ‘디지털 유형(Digital Materiality)’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3D프린팅의 확장성과 가능성을 보여주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도 스위스의 드자흐와 수치(Drzach & Suchy)는 ‘섀도 클라우드(Shadow Clouds)’라는.독특한 큐빅 모양의.조각을 3D프린팅으로 만들었고, 미국의 조각가 케빈 카론(Kevin Caron)도 3D프린팅과 프로토타이핑(모형제작법)을 사용, 대형 조각 작품의 제작기간을 단축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또 미국의 사진작가 산드라 캐닝(Sandra Canning)은 3D 전문 엔지니어팀과 협력해 사진작품을 3D프린팅으로 재창조했다.

 

케빈 카론 [출처: 케빈 카론 블로그]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의 유명 화가인 카츠시카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의 대표작인 ‘카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라는 그림을 3D프린터를 통해 입체적으로 조형한 작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미술, 공연에도 3D프린팅 물결

국내 미술계에 부는 바람도 신선하다. 사비나 미술관에서 열렸던 ‘3D프린팅&아트’전이 아티스트들에게 3D프린터기를 이용한 창작을 제안한데 이어 개인 전시회도 활발하다. 안병국의 ‘한글로 만나는 한국인’전이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품들을 3D프린팅의 형태로 제작해 눈길을 끌었는가 하면, 미디어 아티스트 하석준은 3D프린터와 인체를 소재로 한 ‘달콤한 에너지&미디어아트와 인체의 만남’전을 선보였다.

 

 

공연계도 다소 늦기는 하지만 빠질 수 없다. 재작년 스웨덴의 룬드대학에서는 세계 최초로 3D프린터로 만든 악기로 연주하는 라이브 콘서트가 열렸다. 룬드대학의 학생들은 드럼, 키보드, 기타 등 밴드가 사용하는 악기를 모두 3D프린팅으로 만들었다.

기존 제작법으로는 하기 어려웠던 자신만의 악기를 맞춤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 맥길대학교의 요셉 말로와 이안 해트윅은 착용자의 움직임, 방향, 터치 등이 음악으로 변하는 악기를 3D프린팅으로 만들어 화제가 됐다.

 

레이첼 골드스미스 [출처: 핀터레스트]

 

이처럼 3D프린팅은 예술가에게 혁신적이고 새로운 창작도구로서 표현의 확장에 혁신적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지금껏 상상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재료를 통해 예술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이런 공감대 확산에 한몫을 하고 있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제약 없이 구현되는 것이라면, 3D프린팅은 예술가의 창의성을 무한히 확장하게 해줄 수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똑같이 만드는 행위가 과연 예술인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우려의 시선에 대해 3D프린팅을 연구하는 호드 립슨(Hod Lipson)은 이렇게 대답한다. “재료와 양이 정해져 있어도 요리를 하는 사람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3D프린팅을 통한 예술 작업 역시 예술가의 역량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려의 시선은 만만치 않다. 복제와 관련한 논쟁이다. 예술에서 복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아우라(aura)의 상실’이다. 일본의 경제학자 이케가미 쥰은 복제가 성행하면 ‘우습고 기괴하고 공허한’ 작품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우라가 상실된 작품이 난무할 수도 있다는 염려다. 그러나 3D프린팅은 2D프린팅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질감을 구현해낼 수 있다. 국내에서 프린팅으로도 많이 전시되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그림은 특유의 거친 붓 터치에서 오는 두툼한 질감(마띠에르)이 없어 일반인들도 누구나 조금만 가까이 가면 쉽게 복제품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3D프린팅이라면 마띠에르의 재현마저 가능하다. 이제 머지않아 오리지널 작품과 복제품의 구별은 전문가들에게조차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지 모른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보다 더욱 정교하게 제작 시기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 모를까.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

“3D프린팅 기술이 향상될수록 누구든지 복잡한 제품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전통적 제조와 관련된 자원과 기술의 장벽은 점점 사라져 인간의 창조성을 해방시켜 줄 것이다.” 

 


복제와 창작…예술가들의 선택

복제 논쟁에서 사실 아우라의 상실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술가들이 처하게 될지도 모를 경제적 위험이다. 앞서 언급한 이케가미 쥰은 복제가 성행할 경우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이 일상생활조차 영위치 못할 정도의 저소득에 머무르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한 바 있다.

그러나 레코드나 CD가 유행할 때 예술가들의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지 않았다. 시각예술에선 이미 나날이 정교해져 가는 디지털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한정판을 전제하기는 하지만 이미 ‘디지털 프린트(Digital Print)’가 중요한 부가가치 창출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수공의 미덕’을 내세우면서 기계를 파괴하고자 외치는 ‘미적 러다이트(Luddite)’들..은 이제 그들만의 구습의 장막에서 벗어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복제의 긍정적 측면으로는 작가의 로열티 수입과 더불어 ‘유포효과(propagation effect)’가 있다. 유포효과는 복제품의 존재가 원작의 존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가 있음을 일컫는다(정기문)..

또 예술의 발전에는 원작의 창작뿐 아니라 복사본 등의 역할도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Frey). 유명한 작품을 모방하는 것은 오랫동안 예술가들의 훌륭한 훈련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예술에서도 복제를 배제하기보다는 저작권과 관련된 법·제도적 장치의 마련을 통해 예술가들의 권리를 보호할 방법을 강구할 때인지도 모른다.

혹은 복제의 경제적 효과를 연구하여 예술산업의 진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과학적 체계를 만드는 것이 시대적 소명일 수도 있다.


3D프린팅을 지배하는 예술가들

복제는 당장은 다소 생경하다 하더라도 결국 예술의 새로운 혁명을 낳을 수 있는 단초가 됐다. 문학의 경우, 인쇄본이 등장하면서 듣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변화했다. 직접 만든 시에 곡을 붙여 노래했던 중세의 음유시인은 인쇄본의 출현과 함께 책을 쓰는 작가, 지식인으로 변모했던 것이다(이미혜)..

또 시각예술에 있어서 복제는 새로운 장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코웬(Cowen)은 인쇄기가 훨씬 어렵고 대중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문학사조의 출현을 촉진했듯이, 사진의 발명도 전위적 미술이 성행할 가능성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기존 패러다임에 화가들을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도록 하는 동시에 보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창조를 강제했던 것이다(김진엽)..

3D프린팅 역시 새로운 장르의 출현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헤겔(G. Hegel)은 예술 장르나 예술 양식(style)은 그때그때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태와 연관돼 발생한다고 했다.. 또 예술사회학자 하우저(A. Hauser)도 예술은 표현의 기술적 제수단의 계속적인 혁신과 개선의 역사라고 갈파했다.

예술가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3D프린팅을 활용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의도를 거침없이 발현함으로써 3D프린팅이라는 표현매체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장르를 (표현내용을) 만들어 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3D프린팅이 ‘모든 이들에 의한 예술(Arts by All)’의 시대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제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사람들의 중요한 문화적 활동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는 문화-예술의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전통적인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있으며 대중이 예술의 능동적인 주체로 부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변성찬).. ‘3D프린팅의 신세계’의 저자인 호드 립슨과 멜바 컬만은 이렇게 말했다. “3D프린팅 기술이 향상될수록 누구든지 복잡한 제품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전통적 제조와 관련된 자원과 기술의 장벽은 점점 사라져 혁신을 민주화 하고 갇혀 있던 인간의 창조성을 해방시켜 줄 것이다.”

 

<본 기사는 테크M 제49호(2017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