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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전 세계가 블록체인 투자…기술기업과 상생협력이 관건

2016-03-25김진화 코빗 이사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역설적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환경보호에 동참하자고 에코백을 샀는데 알고 보니 결국 환경에 더 저해가 된다든지, 대기 중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다룬 기사를 읽으며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지만 정작 디젤 스캔들을 일으킨 자동차 메이커의 프로모션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든지….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 역시 매우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술은 원래 정부와 중앙은행, 그리고 각급 금융기관의 존립 이유였던 ‘신뢰의 보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걸 목표로 개발됐는데, 정작 지금은 한국을 포함한 여러 정부 및 금융당국, 글로벌 은행, 증권거래소 등의 금융기관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방점을 찍고 있으니 말이다. 분산화를 핵심 가치로 삼는 기술이 중앙집중적인 권위에 힘입어 사회적 관심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고 있는 상황이다.


블록체인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가상화폐인 비트코인 시스템을 구동하기 위해 고안된 기반 기술이다. 비트코인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P2P 네트워크상에서 구동되는 분권적 화폐 시스템이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신뢰성을 담보하는 중앙기관 없이는 이중지불을 막고 장부의 무결성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작업증명(Proof of Work)이라는 참여적 컨센서스 방식과 블록체인이라는 분산 장부 기술을 토대로 이 한계를 뛰어넘었다.


블록체인 핵심가치는 분산화
얼마 전 발간된 영국정부의 블록체인 보고서는 블록체인의 정의와 기본 메커니즘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분산 장부는 기본적으로 자산의 데이터베이스로, 여러 시스템, 구성원, 그리고 기관들로 구성된 하나의 네트워크상에서 공유될 수 있다. 네트워크의 모든 참여자들은 각자 자기 고유의 장부 복사본을 가질 수 있다. 공유된 장부에 어떤 변경이 발생하면, 그 내용은 모든 장부에 몇 분 내지는 몇 초 만에 반영된다. 장부에 기재된 자산은 금융적, 법적, 물리적, 또는 전자적일 수 있다. 장부에 기재된 자산의 보안성과 엄밀성은 전자키와 전자서명에 의해 암호학적으로 유지되는데, 이것들은 공유된 장부 내에서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새로운 등재 내용은 하나, 여럿 또는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서 네트워크에 의해 동의된 규칙에 준거해 업데이트 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는 블록체인을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 기술로 규정하면서 “거래정보를 기록한 원장을 특정 기관의 중앙 서버가 아닌 P2P 네트워크에 분산해 참가자가 공동으로 기록하고 관리하는 기술을 의미한다”고 포괄적으로 설명했다.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딜로이트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유된 거래 기록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기술”로 정의한다. 아울러 “기술의 총합이면서 공유된 기록 그 자체 또는 장부인 블록체인은 특정한 네트워크상에서 모든 참여자들에게 분산돼 있으며 참여자들은 자신의 컴퓨팅 자원을 이용해 거래기록을 유효화하고, 이를 통해 제3기관의 개입을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 블록체인에 대한 연구작업 성과를 속속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그 실체적 정의에 대한 엄밀하고 일관된 합의는 이뤄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블록체인 기술을 보다 네트워크 친화적으로 진화된 데이터베이스로 보는 견해에서부터 금융에 특화된 새로운 프로토콜로 사고하는 경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이 혼재돼 있다. 새롭게 부상한 기술을 규정하는 단계부터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니 기술 활용을 위한 논의 역시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다. 블록체인에 대한 보다 엄밀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의가 필요한 이유다.


필자는 블록체인을 ‘위변조 증거가 남는 분산 데이터 구조(Tamper-evident distributed data structure)’로 정의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블록체인은 위변조가 불가능한 구조가 아니라 위변조를 쉽게 적발할 수 있도록 구조화된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단순히 분산돼 통신하며 업데이트 되는 장부라기보다는 위변조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가 암호학적으로 더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위변조 행위를 적발하고 그러한 시도에 대응하는 조치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세밀하게 구분할 수 있다.


또 블록체인을 분산 장부나 데이터베이스라고 규정하는 것 보다는 데이터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유연하면서도 정확한 규정일 것이다. 분산 장부 혹은 원장이라는 기술은 금융권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수평적 제한성을 지니며, 데이터베이스라는 규정은 수직적 경직성을 초래한다. 금융 이외의 산업에 적용될 때 블록체인은 단순한 원장 이상의 데이터 구조로 기능할 수 있으며, 단순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이상의 구조적 확장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산된 데이터의 무결성 저장기능뿐만 아니라 디지털 자산과 자료의 분배 및 공유, 메시징, 암호학, 컨센서스 등의 다종 기술이 집약된 구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금융 이어 공공 등으로 적용 확대
비트코인의 실험을 통해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을 확인한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2015년 들어 블록체인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지난 한 해 동안 골드만삭스, 뉴욕증권거래소, 나스닥, 비자, 시티그룹 등은 벤처캐피털과 함께 4억8800만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블록체인 분야에 투자한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는 그 규모가 더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는 게 시장의 전망이다.


골드만삭스와 제이피모건을 비롯한 9개의 글로벌 은행은 지난해 9월 블록체인 이니셔티브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비트코인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을 은행 간 거래 장부로 활용하고, 기술표준까지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참여하는 은행은 점점 늘어나 현재는 40여 개에 이른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의 두 개 은행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은행들도 컨소시엄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은행권 블록체인 개발을 맡은 주체는 골드만삭스의 투자를 받은 R3라는 스타트업이다. 이 업체는 가맹 은행들로부터 월 5만 달러에 이르는 회비를 걷어 들이는 방식으로 운영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은행권 블록체인의 경우 비트코인의 공개형 블록체인과는 다른, 멤버십에 의한 컨소시엄형 블록체인 형태를 띠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비트코인과 같은 자체 화폐(native currency)는 발행하지 않으며, 분산 장부를 통해 은행 간 거래 데이터를 확정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미국의 2대 증권거래소 나스닥 역시 블록체인 기술을 전격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계획만 발표한 게 아니라 실제 개발 중인 프로토타입 화면까지 공개하며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스닥이 지난해 10월 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머니 20/20’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링크(Linq)’는 블록체인 기반 주식등록 및 거래 시스템이다. 링크 프로토타입 화면을 보면, 주주명부, 주식발행 단계와 발행 주식의 종류까지 블록체인으로 기록된다. 나스닥은 비상장 회사의 주식을 디지털 에셋의 형태로 블록체인 장부에 등재하고 주주들이 자신들의 지분만큼 보관, 전송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계약서도, 변호사도 필요 없이 비트코인을 주고받듯 간편하게 주식거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증권거래소도 사실상 필요 없게 된다. 블록체인상의 오더북만으로 P2P 거래가 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나스닥은 거래소 운영자가 아니라 블록체인 운영자로서 다양한 수수료 모델을 갖게 될 것이다.  
IBM도 일찍부터 블록체인의 가능성을 주목해왔다. IBM은 사물인터넷과 스마트계약을 핵심으로 하는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IBM의 이 같은 행보는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맥킨지는 최근 “향후 블록체인 도입으로 금융기관들이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비용절감 효과를 누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렇게 절감되는 비용의 상당부분은 아마도 현재 IBM이 거둬들이는 매출일 것이다. 선제적 대응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겠다는 절박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각국 정부의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와 온두라스 등이 공공기록을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방식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영국 정부도 적극적이다. 최근 내각에서 발행한 블록체인 보고서를 보면 공공부문에의 적용이 곧 가시화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블록체인에 대한 글로벌 은행과 금융기관의 접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적극적이다. 비트코인을 통해 실용화 과정을 거친 분산 장부기술이 기존 금융시스템과 융합될 경우 프로세스 혁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더욱 잰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증권예탁결제원은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서 기존 금융 인프라의 낙후성을 블록체인이 상당부분 개선해줄 것이라 낙관하고 있다.


나아가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장, 예컨대 분산화된 주식거래, 비상장 주식의 거래 자동화 등 새로운 거래형태와 시장이 창출될 가능성 또한 금융권의 관심사다. 다보스포럼은 2025년까지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10%가 블록체인 기반으로 저장, 관리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집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블록체인의 혁신성을 비즈니스 또는 서비스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막 시작되고 있다. 주요 은행들은 스타트업과 공조체계를 구축, 블록체인 기술을 내재화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 등 공적기관들 또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적용 가능성을 신년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그러나 선언적 의미를 넘어 뚜렷하고 구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정교한 이해조차 부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권 기술 내재화 착수
아울러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글로벌 금융기관들의 유연한 접근과 달리,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모든 기술을 내재화하려는 관성에 여전히 젖어 있다는 사실이다. 핵심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동등하고 상생적인 협업체계를 구축해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게 글로벌 금융기관, 대표적으로 골드만삭스, 뉴욕증권거래소, 나스닥, 비자 등의 접근 방식이다.


반면,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과감한 투자 대신 애매한 협력구조로 스타트업을 ‘관리’하려는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타트업과 협업하는 조건으로 소스코드 제공을 의무조항으로 내거는 공공 금융기관도 있을 정도니 발 빠른 대응은커녕 제대로 된 그림이 도출될 수 있을 지조차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단지 하나의 하위 기술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분산공학 내지는 신뢰공학이 금융의 업의 본질에 미치게 될 심대한 영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블록체인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질 글로벌 경쟁에서 또 다시 낙오하게 될 것은 명약관화다.


스마트폰의 등장을 모바일 혁명이라는 큰 맥락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단지 하드웨어의 문제로 협소하게 대응했던 것이 초래한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제 블록체인이라는 시험대에 한국의 금융산업이 올라가 있다.
 

<본 기사는 테크M 제35호(2016년3월) 기사입니다>